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서니 블런트 (문단 편집) == 엘리트 학자의 숨겨진 과거 == 앤서니 블런트가 소련에 포섭된 것은 1933년에서 1934년으로 추정된다.[* 앤서니 블런트뿐 아니라 다른 케임브리지 5인조도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에 포섭되었다고 한다.] 그리고 스파이 활동은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. 그는 이념에 따라 포섭된 간첩의 전형으로, 그 당시 케임브리지에 유행하고 있던 [[마르크시즘]]과 반[[파시즘]] 정서, 그리고 [[게이]]라는 그의 [[성적 지향]]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.[* 도대체 그가 게이라는 것과 [[스파이]]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냐고 할 수 있겠지만 파시즘이 동성애를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했는가를 감안해 보자. 더군다나 영국에서는 당시까지도 [[소도미법|동성애가 불법이었다.]] 그야말로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 그 자체로 처벌을 받았으며, 같은 시기를 살았던 수학자 [[앨런 튜링]]은 동성애 행위로 '''화학적 거세'''형을 받고 우울증으로 자살하기도 했다.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이 폐지된 것은 1967년의 일이고, 그나마도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더 늦어서 각각 1980년, 1982년에야 폐지됐다. 케임브리지 5인조가 전부 게이였던 것은 아니지만, 이러한 개인적 조건과 시대적 배경이 앤서니 블런트를 [[사회주의]]에 마음이 기울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.][*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[[소련]]을 위시한 적지 않은 [[공산주의]] 국가들에서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[[성소수자]]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. 물론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동성애자 인권을 보장했던 나라였으나 그 시절은 길지 않았고 스탈린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동성애자들은 자본주의적 병폐의 증거로 대우받으며 혹독하게 탄압당했다. 대표적으로 [[소련]]이나 [[쿠바]] 같은 국가들에서 성소수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[[굴라크]]로 끌려가곤 했으며 [[북한]]도 마찬가지다. 정말로 개인적 조건과 시대적 배경 때문에 [[소련]]의 첩자가 됐다면 그거야말로 아주 제대로 속은 셈이다.] 그는 1939년에 [[영국 육군]]에 입대하였고 정보요원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가 [[됭케르크 철수작전]]으로 영국에 돌아오게 되었다. 이후에는 [[MI5]]에 합류하여 암호해독요원으로 활동하였고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독일에서 [[윈저 공]]과 [[히틀러]], 그리고 [[나치]]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들을 회수해 오는 --똥처리-- 임무를 맡았다. 이 임무를 맡은 뒤 [[조지 6세]]가 [[대영도서관]]에서의 근무를 권하여 왕립 아카이브에 [[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|빅토리아 공주]][* [[빅토리아 여왕]]의 장녀로 [[프로이센]]으로 시집을 갔다. [[빌헬름 2세]]의 어머니.]의 편지를 비롯한 문서들을 추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. 물론 이 시절에도 그는 소련의 스파이였다. 그가 스파이 활동을 그만둔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다. [[도널드 매클래런]]과 [[가이 버지스]]가 소련으로 도망간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가이 버지스는 블런트와 케임브리지 시절부터 절친했던 사이였고 블런트를 포섭한 장본인이기도 했다. 이 사건을 계기로 블런트는 [[MI5]]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 심적으로도 상당히 괴로워했다. [[킴 필비]]와 매클래런과 버지스가 소련으로 도망간 것과는 달리 블런트는 스파이 활동을 그만두고 영국에 남아 그 뒤에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